선수금을 쥐지 않는 여행사는 가능하다
상조와 선불충전금은 고객 돈을 회사 밖에 보관한다. 여행업만 그 구조를 쓰지 않고 있다
여행업 시리즈 6편이자 마지막이다. 정비공업사 사장이 다른 산업을 같은 눈으로 추적한 기록이다.
공정거래위원회와 상조 공제조합이 운영하는 조회 시스템 "내상조 찾아줘"에 본인인증으로 들어가면, 가입한 상조회사의 영업 상태와 본인 납입 내역, 그 돈을 보전하고 있는 금융기관이 화면에 뜬다. 2019년부터 운영 중인 시스템이다(공정거래위원회). 상조 가입자는 자기가 낸 돈의 소재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수백만 원을 선지급한 여행 소비자에게는 그런 화면이 없다.
이 시리즈는 16년치 후기가 모은 50억 원이 재무에서 무너진 안데르센 사건에서 출발해, 보증 한도가 피해액을 따라가지 못하는 보증보험 제도의 공백까지 왔다. 마지막 편의 질문은 하나다. 선수금을 쥐지 않는 여행사는 가능한가.
여행상품은 에스크로 의무 밖에 있다
전자상거래법 제24조의 결제대금예치(에스크로) 의무는 여행상품을 사실상 비켜간다. 이 조항은 통신판매의 현금성 결제에 에스크로 또는 소비자피해보상보험 가입을 요구하지만, 신용카드 거래와 10만원 미만 소액거래, 그리고 "배송이 필요하지 않은 재화·용역"이 적용 제외다(공정거래위원회 안내). 여행은 배송 개념이 없는 용역이다. 결제 단가가 가장 크고 이행 시점이 가장 먼 상품이 보호 대상에서 빠져 있는 셈이다.
이 공백이 드러난 사건이 2024년 티몬·위메프 미정산 사태다. 2024년 7월 31일 기준 미정산 금액이 2,745억원이었고, 카드사에서 결제대행사와 플랫폼을 거쳐 여행사로 가는 길목의 선수금이 통째로 비는 구조가 확인됐다. 그 뒤 공정거래위원회가 일정 규모 이상 플랫폼에 판매대금 별도관리를 의무화하는 대규모유통업법 개정 방안을 발표해 국회 논의로 이어졌다(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다만 이는 플랫폼 단계의 장치이고, 여행상품 자체를 에스크로 의무 대상으로 넣는 개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법이 강제하지 않으면 스스로 하면 된다. 그런데 국내 여행업에서 선수금 전액을 에스크로나 신탁으로 분리해 보관한다고 내세우는 자발 도입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확인되는 것은 하나투어가 현금 결제 고객에게 안내하는 하나은행 구매안전서비스 정도인데, 이는 결제에서 구매 확정까지의 표준 서비스이지 출발 시점까지의 예치가 아니다. 그 사이 소비자 피해는 쌓인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2020~2024년 여행 관련 피해구제 신청은 3,922건이고 해외여행이 85.6%, 위약금·환급 지연 같은 계약 관련이 66.0%였다.
표준 에스크로는 여행에 맞지 않는다
여행사가 에스크로를 안 쓰는 데에는 구조적 이유도 있다. 표준 결제대행 에스크로는 "배송 완료"를 돈 푸는 기준으로 설계된 장치라서, 결제와 이행 사이가 몇 달씩 벌어지는 여행상품과 맞물리지 않는다. 토스페이먼츠는 구매확정 후 3영업일에 판매자에게 정산하고(2025년 토스페이먼츠 공시), KG이니시스는 배송등록 후 6영업일이면 자동으로 구매가 확정된다. 물건이 도착하면 곧바로 돈이 판매자에게 넘어가는 설계다.
여행은 반대다. 결제 후 6개월에서 1년 넘게 회사가 돈을 쥔 채 이행을 기다린다. 보호가 필요한 구간은 바로 그 대기 구간인데, 표준 에스크로는 그 구간을 커버할 해제 조건 자체가 없다. 비용이 문제가 아니다. 에스크로 추가 수수료는 카드·계좌이체 기준 결제액의 0.2% 수준이다(2025년 토스페이먼츠 공시). 싼 장치가 있는데 구조가 안 맞아서 못 쓰는 상태에 가깝다.
옆 업종은 이미 선수금을 분리해 보관한다
고객 선지급금을 회사 밖에 보관하게 하는 제도는 이미 두 업종에서 법으로 작동하고 있다. 여행업과 같은 "돈 먼저, 이행 나중" 구조를 가진 업종들이다.
| 항목 | 상조 | 선불충전금 | 여행 |
|---|---|---|---|
| 근거 법 | 할부거래법 | 전자금융거래법 (2024-09-15 시행) | 관광진흥법 |
| 보전 의무 | 선수금의 50% | 충전금의 100% 별도관리 | 없음 (보증보험·공제만) |
| 보전 방식 | 은행 예치·지급보증·보험·공제 4방식 | 예치·신탁·지급보증 3방식 | 해당 없음 |
| 소비자 확인 | "내상조 찾아줘" 직접 조회 | 제도상 별도관리 의무 | 확인 수단 없음 |
상조는 할부거래법이 선수금의 50% 보전을 강제한다. 2017년 9월 기준 총 선수금 4조 4,866억원의 50.6%가 보전돼 있었고(공정거래위원회), 2025년에는 보전 비율을 80%로 올리는 논의가 보도됐다(서울경제TV). 상조의 경험은 보전 방식의 실질 차이도 보여준다. 2015년 공정위 자료 기준 공제조합의 실제 담보금은 선수금의 9.8~18% 수준에 그쳤다(한국경제). 같은 "50% 보전"이라도 은행에 돈이 실재하는 예치와 조합의 약속인 공제는 다르다는 것이 이 시장이 치른 수업료다.
선불충전금은 더 나갔다. 머지포인트 사태 이후 개정된 전자금융거래법이 2024년 9월 15일 시행되면서, 선불업자는 충전금 전액을 예치·신탁·지급보증보험으로 별도관리하고 안전자산으로만 운용해야 하며 상계·압류도 금지된다(금융위원회). "고객 돈 100% 별도관리"라는 표현의 제도적 전례가 이미 한국에 있다.
해외 여행업은 신탁과 계약으로 풀었다
여행업 안에서 선수금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전례는 해외에 있다. 나라마다 방식이 다르고, 방향은 갈린다.
| 항목 | 영국 | 미국 (EF 사례) | 일본 |
|---|---|---|---|
| 장치 | ATOL 면허 + 기금 | 계약 설계 + 보험 | 영업보증금 공탁 |
| 돈의 위치 | 기금 갹출, 신탁 분리로 이동 중 | 분납으로 선지급 자체를 축소 | 회사 보유, 사후 변제 |
| 소비자 증명 | ATOL 증서 발급 의무 | 계약서의 환불 공제표 | 없음 |
영국은 항공 포함 패키지 판매업자에게 민간항공청(CAA)의 ATOL 면허를 요구하고, 판매 1인당 2.50파운드를 기금에 적립해 업체 도산 시 환불과 귀국 항공편을 책임진다. 소비자에게는 예약 시 ATOL 증서 발급이 의무라 보호 여부가 문서로 확인된다. 개혁 방향이 더 중요하다. CAA는 2021년부터 고객 선수금을 신탁이나 에스크로로 분리 보관하도록 유도하고 분리 수준에 따라 기금 납부액을 차등하는 개혁을 협의해 왔다(CAA·ABTA). 사후 변제 기금에서 사전 분리 보관으로, 제도 선진국이 이동하는 방향이 그쪽이다.
미국의 교육여행사 EF는 제도가 아니라 계약으로 푼 사례다. 2026년 확인한 EF 약관 기준으로 등록비 95달러 외에는 월 단위 분납이 기본이고 잔금은 출발 110일 전에 낸다. 취소 시 공제액은 출발 360일 전이면 등록비와 100달러, 59일 이내면 환불 없음까지 시점별 표로 계약서에 고정돼 있다. 환불을 "협의"하는 게 아니라 계약서를 읽으면 끝난다. 목돈 선납 자체를 없애 회사가 쥐는 선수금을 줄이고, 나머지 리스크는 보험 상품으로 제3자에게 넘긴다.
일본은 한국과 같은 계열이다. 여행업 등록 시 영업보증금을 공탁하는데, 해외 모집형 제1종 기준 7,000만엔이다. 업체가 도산하면 여행자가 공탁금에서 변제받지만, 피해가 보증금을 넘으면 비례 배분이라 전액 회수 보장이 없다(일본여행업협회·일본 국민생활센터). 선수금 분리가 아닌 사후 변제 기금 모델의 한계는 한국 보증보험과 동일하다.
비어 있는 포지션
국내 여행업에서 "선수금을 회사가 쥐지 않는다"는 포지션은 비어 있다. 선수금 없는 여행 거래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학교 단체 수학여행은 오히려 후불 정산이 관행이라, 선금을 지급할 수 있는데도 주지 않는 학교가 많아 여행사가 돈을 빌려 행사를 치른다는 보도가 있을 정도다(여행신문, 2024). 선수금 문제는 소비자가 직접 결제하는 모집형 상품에서 발생하고, 정확히 그 영역이 무방비다.
법정 보증보험은 그 자리를 채우지 못한다. 신설 종합여행업의 기본 보증은 5,000만원, 기획여행을 해도 2억원 추가가 전부다(관광진흥법 시행규칙 별표3, 2021년 개정). 2023년 대전의 한 여행사 파산에서는 피해 25억 2천만원에 공제 한도가 2억 5천만원이었고(트래블아이), 2026년 8월 안데르센 사태에서는 피해자들이 확인한 결제액만 50억원을 넘겼는데 회사가 표기한 보증 총액은 2억 4,000만원이었다(오마이뉴스·자사 표기 기준). 보증은 손해배상의 재원이지 돈의 분리가 아니다.
재료는 전부 나와 있다. 상조가 증명한 은행 예치·신탁과 소비자 직접 조회, 선불충전금이 증명한 100% 별도관리, 영국이 이동 중인 신탁 분리, EF가 증명한 분납과 환불 공제표의 계약 고정. 이 가운데 가장 강한 장치는 신탁이다. 회사 명의가 아닌 신탁계정에 들어간 선수금은 약정 조건을 채워야만 인출되고, 회사가 도산해도 파산재단에서 분리된다. 잔고가 은행에 실재하니 상조의 조회 시스템 같은 확인 화면도 만들 수 있다. 어느 것도 새 발명이 아니고, 어느 것도 여행업에 법으로 강제돼 있지 않다. 강제되지 않았다는 것은 먼저 하는 사업자에게 차별화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대가는 있다. 선수금을 신탁에 넣으면 항공권 발권과 지상비 선지급을 자기자본으로 돌려야 하고, 그동안 선수금을 운전자본으로 굴려온 업계 관행과는 반대로 가는 길이다. 그 관행의 끝이 어디인지는 이 시리즈가 이미 확인했다.
여행업의 신뢰 문제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돈의 위치 문제다. 제도가 못 지키는 선수금을 지키는 구조는 옆 업종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고, 여행업만 안 쓰고 있다. 이 빈자리를 채우는 사업자는 나올 것이다. 그게 기존 대형사일지, 밖에서 들어오는 신규 진입자일지가 다음 10년의 여행업을 가른다.
새 글은 뉴스레터로 받아볼 수 있다. 여행업 종사자, 그리고 같은 구조 문제를 들여다보는 자영업 사장의 연락을 환영한다.
출처
본문에 인용한 제도·수치의 근거는 아래와 같다. 국내 법령·정부 자료와 해외 제도 원문, 업계 보도가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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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제도·정부 자료
- [결제대금예치제(에스크로) 주요 내용 — 공정거래위원회]
- [대규모유통업법 개정 방향(플랫폼 판매대금 별도관리)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 [상조업체 선수금 50% 금융권 예치 의무화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 [내상조 찾아줘 통합조회 서비스 — 공정거래위원회·상조공제조합, 2019 개시]
- [선불충전금 100% 별도관리(개정 전자금융거래법 시행) — 금융위원회, 2024]
- [관광진흥법 시행규칙 별표3 보증보험 가입금액 기준 — 국가법령정보센터, 2021 개정]
- [여행 관련 소비자 피해구제 현황(2020~2024년 3,922건) — 한국소비자원]
- [PG 수수료·에스크로 수수료 공시 — 토스페이먼츠, 2025]
해외 제도
- [ATOL 보호 분담금·개혁 협의 — 영국 민간항공청(CAA)·ABTA, 2021~]
- [EF 예약 약관(분납·환불 공제표) — EF Educational Tours, 2026 접속]
- [일본 여행업법 영업보증금·변제업무보증금 제도 — 일본여행업협회(JATA)·일본 국민생활센터]
보도·사례
- [티메프 사태 제도개선·에스크로 의무화 쟁점 — 아시아경제, 2024]
- [상조 선수금 80% 별도 예치 논의 — 서울경제TV, 2025]
- [상조공제조합 담보비율 현황 — 한국경제·공정거래위원회, 2015]
- [수학여행 행사비 후불 정산 관행 — 여행신문, 2024]
- [대전 중소 여행사 파산, 피해 25억원 — 트래블아이, 2023]
- [안데르센 여행사 피해자 결제액 50억원 초과 — 오마이뉴스,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