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번호는 통신사 것이 아니라 국가 자원이다
전기통신번호관리세칙이 정하는 번호의 소유, 부여, 회수, 그리고 매매 금지
이 글은 《전화번호의 경제》 시리즈 2편이다. 1편에서 가게 하나에 얽힌 번호 여섯 종의 지도를 그렸다. 이번 편은 그 지도의 밑판, 번호라는 자원을 누가 소유하고 어떻게 나눠 주는지를 법조문에서 확인한다.
번호는 빌려 쓰는 국가 자원이다
전화번호의 법적 소유자는 국가다. 통신사가 아니고, 십 년 넘게 그 번호로 장사한 가게도 아니다. 근거는 전기통신사업법 제48조와 그 위임을 받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고시 「전기통신번호관리세칙」이다. 세칙 제1조는 번호를 이렇게 규정한다.
전기통신역무의 효율적 제공, 이용자의 편익과 전기통신사업자 간 공정한 경쟁환경 조성 및 유한한 국가자원인 전기통신번호의 효율적 관리를 위하여 전기통신번호관리계획에 관한 기본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유한한 국가자원"이라는 표현이 이 제도 전체의 요약이다. 번호는 조합이 유한한 자원이고, 그래서 정부가 관리계획을 세워 배분한다. 전기통신사업법 제48조는 과기정통부 장관에게 번호자원 관리계획의 수립·시행 의무를 부여하고, 그 계획을 고시하게 하며, 사업자에게 준수 의무를 지운다.
이 위에서 번호의 소유 구조는 세 층으로 정리된다.
| 층 | 주체 | 권리의 성격 |
|---|---|---|
| 소유 | 국가(과기정통부) | 식별번호 용도 지정, 사업자 배정, 회수 |
| 부여 | 통신사업자 | 배정받은 대역 안에서 가입자에게 번호 개통 |
| 이용 | 가입자(가게·개인) | 이용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의 사용권 |
1편에서 본 식별번호의 용도, 그러니까 010은 이동전화, 070은 인터넷전화, 050은 가상번호, 080은 착신과금, 060은 전화정보서비스, 15XX는 대표번호라는 구분도 전부 이 세칙이 정한 것이다. 070 사업을 하고 싶다고 069를 쓸 수 없고, 050 대역을 배정받은 사업자가 그 번호로 다른 장사를 할 수 없다. 용도 지정이 곧 시장의 구획이다. 식별번호 하나가 새로 열리면 시장이 하나 생기고, 닫히면 시장이 닫힌다.
가게 사장의 자리에서 이 구조가 뜻하는 바는 명확하다. 간판에 박아 둔 그 번호에 대해 가게가 가진 것은 소유권이 아니라 이용 계약상의 지위다. 계약이 살아 있는 동안 쓰고, 통신사를 바꿀 때는 번호이동 제도가 그 지위를 옮겨 준다. 번호이동조차 시장의 자연 발생물이 아니라 국가가 사업자에게 강제한 제도다. 번호를 둘러싼 권리 중 시장에서 저절로 생긴 것은 거의 없다. 전부 설계된 것이다.
번호는 사고팔 수 없다, 2026년부터는 법조문으로
번호가 국가 자원이라는 원칙은 2026년에 매매 금지 조항으로 한 번 더 명문화됐다. 법률 제21652호로 신설된 전기통신사업법 제48조의2는 "누구든지 유한한 국가자원인 전기통신번호를 매매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못 박고, 번호 매매 게시물에 대해 과기정통부가 서비스 폐쇄·게시 제한을 명할 수 있게 했다. 시행일은 2026년 5월 19일이다.
이 조항이 겨누는 것은 번호 거래 시장이다. 끝자리가 좋은 이른바 골드번호는 오래전부터 음성적으로 거래돼 왔다. 통신사들이 선호 번호를 추첨으로 배정하는 관행을 둔 것도 이 수요 때문이다. 자원의 명의는 국가에 있는데 그 위에 사설 유통 시장이 생기니, 법이 거래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쪽으로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주파수와의 대비가 흥미롭다. 같은 국가 자원이라도 주파수는 돈을 받고 배분한다. 이동통신사들이 주파수 경매에서 수천억 원대의 할당 대가를 써내는 뉴스가 낯설지 않다. 반면 번호에는 그런 유상 할당 제도가 확인되지 않는다. 이번 조사에서 번호관리세칙과 시행령을 살핀 범위에서는 번호 자원 사용 자체에 부과되는 대가 조항을 찾지 못했다. 등록·신고에 따르는 행정 수수료가 있을 뿐이다. 구조적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주파수는 물리적으로 늘릴 수 없는 스펙트럼이라 경합이 세고, 그래서 가격을 매겨 배분한다. 번호는 자릿수를 늘리면 공급이 늘어나는 자원이라 경합이 약하고, 그래서 무상 배정으로 운영한다. 같은 "유한한 국가자원"이라는 수식어 아래 배분 방식은 정반대다.
이 대비는 통신사업의 원가 구조에도 흔적을 남긴다. 이동통신 요금에는 조 단위 주파수 대가가 녹아 있지만, 번호 자체는 사업자에게 원가가 아니다. 5편에서 보겠지만 070 회선의 기본료는 월 천 원대까지 내려가는데, 그 가격이 가능한 배경에 번호 무상 배정이 있다. 번호가 유상이었다면 가상번호를 수백만 개씩 뿌리는 안심번호 사업의 그림도 달라졌을 것이다.
번호의 생애, 부여에서 회수까지
사업자가 번호 대역을 받는 절차는 신청과 심사, 그리고 회수 조건이 붙은 부여다. 번호관리세칙 제20조에 따르면 사업자는 정해진 서류를 갖춰 번호를 신청하고, 과기정통부는 신청일부터 2개월 이내에 결과를 통보한다. 부여 기준은 전기통신역무의 효율적 제공, 이용자 편익과 공공이익, 공정경쟁 환경 조성이다. 돈을 내는 절차가 아니라 소명하는 절차다.
부여된 번호는 조건부다. 세칙 제21조는 번호 회수 사유를 열한 가지 규정하는데, 확인된 주요 항목만 봐도 성격이 드러난다. 부여받은 목적과 다르게 사용하는 경우, 이용자에게 현저히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경우, 그리고 번호 사용 개시일부터 6개월 이내에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은 경우. 받아 놓고 안 쓰면 뺏기고, 딴 데 쓰면 뺏긴다. 번호 대역이 사업자의 재고 자산이 아니라 용도가 지정된 임차 자원이라는 것이 회수 조항에서 분명해진다.
이 행정이 실제로 작동한 가장 큰 사례가 이동전화 식별번호 통합이다. 011, 016, 017, 018, 019로 통신사마다 다르던 식별번호를 2004년 1월부터 신규 가입 기준 010으로 통합했다. 당시 011은 "스피드 011"이라는 광고가 보여 주듯 SK텔레콤의 브랜드 그 자체였다. 정부가 식별번호를 통합하자 그 브랜드 자산은 소멸 경로에 들어섰고, 2G 서비스 종료와 함께 01X 번호들은 역사에서 퇴장했다. 번호 위에 쌓은 브랜드가 아무리 커도, 밑판인 번호 정책이 바뀌면 그 자산은 유지되지 않는다. 국가 자원 위에 세운 사유 자산의 운명이라는 점에서, 1편에서 본 0507 위에 쌓이는 가게 접점과 구조적으로 같은 이야기다.
번호 정책은 시장을 만드는 쪽으로도 작동한다. 050 대역이 열리면서 안심번호 시장이 생겼고, 070 대역이 열리면서 인터넷전화 시장이 생겼으며, 012·013 같은 사물통신 대역이 정비되면서 기계들의 통신 시장이 자리를 잡았다. 식별번호 신설은 국가가 시장 하나를 개장하는 행위다. 그 시장에서 뛸 자격, 즉 사업자 지위를 어떻게 얻는지가 다음 편의 주제다.
사장에게 번호 정책이 보이는 순간
번호 행정은 평소에는 보이지 않다가, 가게의 번호가 걸린 결정의 순간마다 규칙으로 나타난다. 몇 장면만 짚는다.
통신사를 갈아탈 때. 번호이동이 당연한 권리처럼 느껴지지만, 앞에서 본 대로 이것은 국가가 설계해 사업자에게 강제한 제도다. 시내전화 번호를 인터넷전화로 들고 가는 것도, 알뜰폰으로 옮기며 010 번호를 유지하는 것도 같은 설계의 산물이다. 갈아타기 전에 위약금은 따져도 번호이동 가능 여부를 따지는 사장은 드문데, 회선 종류에 따라 이동의 조건이 다르므로 확인할 가치가 있다.
가게를 넘길 때. 사업 양수도에서 전화번호는 명시적으로 챙겨야 하는 항목이다. 번호의 이용 계약 지위가 양수인에게 넘어가도록 통신사 명의변경 절차를 밟지 않으면, 권리금에 포함됐다고 생각한 단골 접점이 전 사장의 명의에 남는다. 세칙에도 사업 양도·양수와 합병 시의 번호 처리 조항이 별도로 있을 만큼, 번호의 승계는 제도가 따로 다루는 문제다.
새 대역이 열릴 때. 050이, 070이, 사물통신 번호가 그랬듯, 식별번호 하나가 열리면 그 위에 사업자들이 상품을 만들고 그 상품이 몇 년 뒤 가게의 일상으로 들어온다. 0507 안심번호가 지금 자영업 표준 장비가 된 것처럼. 번호 대역 관련 정책 뉴스는 자영업자에게 남의 이야기 같지만, 시차를 두고 반드시 가게 카운터까지 온다.
정리하면 이렇다. 번호의 세계에서 국가는 지주이고, 통신사는 임차 사업자이며, 가게는 전차인이다. 임대차 구조를 모르고 장사하는 사장이 없듯, 번호의 임대차 구조도 알고 쓰는 것이 맞다. 다음 편은 중간층인 통신사업자 쪽으로 올라간다. 2019년에 통신사업의 문턱이 어떻게 내려갔고, 그런데도 왜 아무나 통신사가 되지는 못하는지. 그 답이 이 시리즈 후반부의 아톡과 알뜰폰 이야기의 토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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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칙 인용문은 국가법령정보센터에 게재된 「전기통신번호관리세칙」 원문이며, 조사 시점에 확인한 판본은 2017년 시행판이다. 이후 개정으로 조 번호가 달라졌을 수 있다. 번호 자원 사용에 대한 유상 부과금이 없다는 서술은 세칙·시행령 조문 범위에서의 확인으로, 완전한 부존재 증명은 아니다.